경영

좌석당 과금은 끝났다 — AI 시대 SaaS 가격정책의 붕괴

좌석당 과금은 끝났다 — AI 시대 SaaS 가격정책의 붕괴

사람 수에 따라 돈을 받던 소프트웨어가, 이제는 일의 양과 결과에 따라 가격을 다시 쓰고 있다


오랫동안 SaaS의 가격정책은 단순했다. 한 명이 쓰면 1 seat, 열 명이 쓰면 10 seats. 사용자 수가 늘수록 매출이 늘어나는 구조였다. 직관적이었고, 예측 가능했으며, 투자자도 좋아했다. 소프트웨어 기업 입장에서는 매출을 설계하기 쉬웠고, 고객 입장에서도 예산을 짜기 쉬웠다.

그런데 AI가 이 질서를 깨고 있다.

AI 시대의 소프트웨어는 더 이상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사용자를 보조하는 코파일럿이 되고, 반복 업무를 대신 수행하는 에이전트가 되며, 어떤 영역에서는 사람 대신 결과를 만들어내는 실행 시스템이 된다. 이 순간부터 기존의 좌석당 과금 모델은 이상해진다. 사람 수가 줄수록 가치가 커지는 소프트웨어를, 왜 사람 수 기준으로 팔아야 하는가?

SaaS의 가격정책이 흔들리는 이유가 여기 있다. AI는 제품 기능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소프트웨어가 돈을 버는 방식 자체를 바꾸고 있다.


1. 좌석당 과금은 ‘사람이 소프트웨어를 직접 쓰는 시대’의 모델이었다

전통적인 SaaS는 기본적으로 인간 사용자를 전제로 설계됐다. CRM도, 협업툴도, ERP도 결국은 사람이 로그인해서 기능을 쓰는 구조였다. 그렇기 때문에 가격도 자연스럽게 사용자 수에 연동됐다. seat-based pricing은 사용량을 완벽하게 반영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가치 측정의 대리변수 역할은 했다.

문제는 AI가 이 전제를 무너뜨린다는 점이다.

AI 코파일럿은 한 명의 직원 생산성을 몇 배로 높일 수 있다. AI 에이전트는 아예 사람이 하던 일부 업무를 대체한다. 예전에는 열 명이 하던 일을 이제 두 명과 몇 개의 에이전트가 해낸다. 이때 seat 수는 줄어드는데, 고객이 얻는 가치는 오히려 커진다. 공급자 입장에서는 제품 가치가 커졌는데도 청구 가능한 좌석 수는 줄어드는 역설이 생긴다.

즉, AI는 seat이라는 가격 단위를 가치 측정 기준으로 더 이상 신뢰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

다만 이 말이 seat-based pricing이 내일 당장 사라진다는 뜻은 아니다. 더 정확한 표현은 이렇다. 좌석당 과금은 기본 골격으로 후퇴하고 있다. 이제 진짜 돈은 좌석이 아니라, 그 위에서 돌아가는 AI 사용량과 결과에서 벌기 시작한다.


2. AI 소프트웨어는 공짜로 제공되지 않는다 — COGS가 돌아왔다

기존 SaaS의 강점 중 하나는 한 명의 고객을 추가로 받는 비용이 거의 0에 가까웠다는 점이다. 그래서 높은 총마진이 가능했고, 좌석 기반 정액제가 잘 작동했다.

하지만 AI 소프트웨어는 다르다. 매번 질의를 처리할 때마다 추론 비용이 들고, 데이터 처리 비용이 들며, 경우에 따라서는 사람 검수(human in the loop) 비용까지 발생한다. 다시 말해 AI는 소프트웨어의 변동비를 되살렸다.

이건 가격정책에 치명적인 변화를 만든다. 사용량이 많은 고객을 정액 seat-based로만 받으면, 매출은 제한되는데 비용은 계속 증가할 수 있다. 실제로 AI 기업들은 전통 SaaS보다 훨씬 더 촘촘하게 원가를 관리해야 한다.

이 점은 AI-native 기업일수록 더 극명하다. OpenAI API는 대표적인 사례다. 가격은 사용자 수가 아니라 1M tokens당 input/output 비용, 웹검색 호출당 비용, 처리 모드별 차등 가격으로 설계된다. 이건 단순한 과금 방식의 선택이 아니라, AI 제품의 원가가 seat가 아니라 compute event에 묶여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래서 usage-based pricing이 다시 강해진다. 토큰 수, API 호출 수, 자동 처리 건수, 생성된 결과물 수 같은 사용량 기반 과금이 늘어나는 이유는 단순히 유행이 아니라, 원가 구조가 그렇게 생겼기 때문이다.


3. 가격은 기능이 아니라 ‘가치 단위’로 이동하고 있다

AI 시대 가격정책의 핵심 변화는 기능 가격표가 아니라 가치 단위(unit of value) 의 재정의다.

예전에는 “이 기능을 쓸 수 있다”가 상품이었다. 이제는 “이 일을 몇 건 처리했는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절약했는가”, “실제로 어떤 결과를 냈는가”가 더 중요한 가격 기준이 된다.

예를 들어 고객지원 소프트웨어가 AI를 통해 문의를 자동 해결한다면, 고객은 좌석 수보다 ‘몇 건의 티켓을 해결했는가’에 더 민감해진다. 세일즈 AI가 리드를 선별하고 후속 액션까지 수행한다면, 고객은 라이선스 수보다 ‘몇 개의 기회를 만들었는가’를 보게 된다. 회계·법무·보안·개발 도구도 마찬가지다. AI가 실질적으로 노동을 대체할수록 가격은 사용자 수보다 처리량과 성과로 이동한다.

이 흐름의 끝에는 outcome-based pricing, 즉 결과 기반 과금이 있다. 고객은 접근 권한이 아니라 결과에 돈을 내고 싶어 한다. 공급자는 기능이 아니라 성과를 약속하게 된다.

Intercom의 Fin 같은 고객지원 AI가 보여주는 메시지도 이 방향과 맞닿아 있다. 이 제품이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좌석 수가 아니라 resolution rate, 즉 얼마나 많은 문의를 실제로 해결하느냐다. AI 에이전트 시대에는 기능 목록보다 해결 건수와 성과 지표가 더 강한 가격 언어가 된다.

AI SaaS pricing is shifting from per-seat licenses to hybrid usage and outcome-based pricing.
AI SaaS 가격정책은 좌석 수에서 사용량·성과 중심의 하이브리드 모델로 이동하고 있다.

4. 그래서 가장 현실적인 답은 하이브리드 모델이다

그렇다고 모든 SaaS가 당장 결과 기반 과금으로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outcome pricing은 가장 매력적이지만, 동시에 가장 어렵다. 결과의 정의가 모호할 수 있고, 고객별 편차도 크며, 공급자가 비용 변동성을 너무 많이 떠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지금 시장이 가장 많이 수렴하는 지점은 하이브리드 모델이다.

기본 플랫폼 요금이나 최소 구독료는 유지하되, 그 위에 사용량 기반 또는 성과 연동 요소를 붙이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기본 seat fee + AI 크레딧, 기본 구독료 + 자동 처리 건수 요금, 혹은 플랫폼 fee + 결과 달성 보너스 구조가 여기에 해당한다.

Salesforce Agentforce는 이 과도기 모델을 가장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이 제품은 per-user 라이선스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Flex Credits 기반 consumption pricing, conversation당 과금 같은 방식을 함께 제공한다. 즉 시장은 이미 “seat냐 아니냐”를 넘어서, seat + usage + workflow-specific pricing을 동시에 쓰는 혼합 모델로 이동 중이다.

이 모델이 힘을 얻는 이유는 분명하다. 고객에게는 일정 수준의 예측 가능성을 주고, 공급자에게는 사용량 증가와 가치 확대에 따른 업사이드를 남겨주기 때문이다. 전통 SaaS의 안정성과 AI 소프트웨어의 변동성을 모두 반영할 수 있는 절충안인 셈이다.


5. 기존 SaaS 강자들은 좌석당 과금을 버리는 대신 ‘연장’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모든 기업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AI-native 기업들은 usage pricing으로 자연스럽게 가지만, 기존 SaaS 강자들은 seat-based pricing을 완전히 버리기보다 연장하고 보강하는 전략을 택한다.

Microsoft 365 Copilot이 좋은 예다. Microsoft는 Copilot을 기존 Microsoft 365 구독 위에 얹는 add-on 라이선스 구조로 판매한다. 일부 AI 기능은 번들에 포함시키고, 더 강한 업무 맥락 연동과 고급 기능은 추가 라이선스로 과금한다. 이건 좌석당 과금의 종말이라기보다, 좌석당 과금 위에 AI 프리미엄을 덧씌우는 방식이다.

이 전략은 이해할 만하다. 거대한 엔터프라이즈 고객은 여전히 예측 가능한 예산 구조를 원하고, 대형 소프트웨어 기업은 기존 구매 시스템을 한 번에 뒤집기 어렵다. 그래서 레거시 SaaS의 첫 반응은 혁명이 아니라 진화다. seat model은 남기고, AI는 add-on과 번들링으로 가격을 확장한다.

하지만 이 방식도 영원하진 않을 가능성이 크다. AI가 점점 더 실제 노동을 대체할수록, 고객은 결국 “몇 명이 쓰느냐”보다 “얼마나 많은 일을 처리하느냐”를 기준으로 가격을 다시 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6. 가격정책은 이제 재무팀의 문제가 아니라 GTM 전략의 중심이 된다

AI 이전에도 가격은 중요했지만, 많은 회사에서 가격정책은 상대적으로 늦게 손보는 항목이었다. 제품이 어느 정도 자리 잡은 뒤, 세일즈 효율을 보면서 조정하는 영역에 가까웠다.

하지만 AI 시대에는 다르다. 가격정책은 제품 설계, 세일즈 방식, 고객 성공 전략, 심지어 조직 구조까지 바꾼다.

무엇을 가격 단위로 잡느냐에 따라 영업은 어떤 가치를 팔아야 하는지가 달라진다. 고객 성공팀은 좌석 확장이 아니라 사용량 확대나 성과 극대화를 관리해야 한다. 재무팀은 ARR만이 아니라 사용량 변동, 코호트별 마진, 약정 매출과 초과 사용 매출의 비중까지 함께 봐야 한다. 제품팀은 기능을 많이 넣는 것보다 ‘돈이 되는 사용 단위’를 설계해야 한다.

즉, 가격은 더 이상 청구 방식의 문제가 아니다. 제품이 시장에서 어떤 가치를 대표하는지에 대한 선언이 된다.


7. seat-based SaaS의 붕괴는 SaaS 기업의 양극화를 부를 것이다

이 변화는 모든 SaaS 기업에 같은 기회를 주지 않는다. 오히려 훨씬 더 큰 양극화를 만들 가능성이 높다.

첫 번째 승자는 명확하다. AI가 대체하는 노동 단위와 고객 가치가 분명한 회사들이다. 이들은 usage 또는 outcome 기반 가격을 설계해 더 많은 가치를 포획할 수 있다. 기존 seat-based SaaS보다 더 큰 매출 업사이드를 가져갈 수도 있다.

반대로 위험한 쪽도 분명하다. AI를 붙이긴 했지만, 여전히 무엇을 기준으로 돈을 받아야 할지 모호한 회사들이다. 이들은 AI 기능을 무료 부가 기능처럼 덧붙이다가 원가만 늘고 가격 인상은 못 하는 함정에 빠질 수 있다. 고객은 더 많은 기능을 기대하지만, 공급자는 그 비용을 가격에 전가하지 못한다. 그러면 AI는 성장 동력이 아니라 마진 파괴 요인이 된다.

결국 앞으로의 경쟁은 “누가 더 좋은 AI를 붙였는가”보다, 누가 더 설득력 있는 가치 단위와 가격 구조를 설계했는가에서 갈릴 가능성이 크다.


8. 한국 SaaS에게 더 어려운 문제일 수 있다

이 변화는 한국 SaaS 기업에게 특히 더 어렵다. 이유는 간단하다. 국내 SaaS 시장은 오랫동안 비교적 익숙한 구독형 가격정책에 기대어 왔고, 엔터프라이즈 구매자들도 여전히 예측 가능한 정액 모델을 선호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AI 시대에는 그 익숙함이 오히려 약점이 될 수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 usage-based와 hybrid pricing이 빠르게 표준이 되면, 한국 SaaS는 두 가지 압박을 동시에 받게 된다. 하나는 원가 압박이다. AI 기능을 넣을수록 비용은 늘어나는데 가격 구조는 그대로면 마진이 흔들린다. 다른 하나는 가치 설명 압박이다. 글로벌 고객은 “몇 좌석이냐”보다 “그래서 얼마나 일을 대신하느냐”를 묻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 SaaS가 글로벌로 가려면 기능 번역만으로는 부족하다. 가격정책의 언어 자체를 다시 배워야 한다.


결론: AI는 소프트웨어의 기능보다, 가격표를 먼저 무너뜨리고 있다

많은 SaaS 기업이 AI를 기능 혁신으로 이해한다. 물론 맞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변화는 다른 데 있다. AI는 제품 화면보다 먼저, 가격표를 무너뜨리고 있다.

좌석당 과금은 사람이 직접 소프트웨어를 쓰고, 공급자의 추가 비용이 거의 없으며, 가치가 사용자 수에 대략 비례하던 시대의 모델이었다. 이제 그 전제는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 AI는 사람 수를 줄이면서 가치와 비용을 동시에 키운다. 이 구조에서 좌석 기반 과금은 점점 더 부정확해진다.

앞으로의 SaaS 가격정책은 seat에서 usage로, usage에서 outcome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크다. 물론 모든 회사가 한 번에 그 끝까지 가기는 어렵다. 그래서 당분간은 하이브리드 모델이 가장 현실적인 주류가 될 것이다. 하지만 방향성만큼은 분명하다.

소프트웨어는 더 이상 ‘몇 명이 쓰는가’로 가격을 정하는 상품이 아니다.
이제는 ‘얼마나 많이 처리하는가’, 그리고 ‘실제로 어떤 결과를 내는가’로 가격을 다시 써야 하는 시대다.

좌석당 과금은 끝나고 있다.
그리고 AI 시대 SaaS의 진짜 경쟁은 모델 성능이 아니라, 가치 포착 방식의 재설계에서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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